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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 도시락폭탄 던졌을까 물통폭탄 던졌을까?

각희골 2024. 12. 20.

윤봉길 의사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의 고위 관료들에게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 육군 대장 등 2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무엇일까요? 윤봉길 의사하면 흔히 도시락 폭탄을 떠올리는데요, 해당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윤봉길 의사 도시락폭탄 던졌을까

<윤봉길 의사 도시락폭탄 던졌을까?>

윤봉길 의사가 지녔던 폭탄은 도시락 모양의 폭탄과 물통 모양의 폭탄이었는데요. 도시락 폭탄은 던지지 못했고 물통 폭탄만 투척했습니다.

 

1932년, 윤봉길 의사는 일본 국왕의 생일 축하 행사에서 우리나라를 침탈한 일제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따라서 윤봉길 의사는 물통을 이용해 우리나라를 침탈한 일본의 주요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한 투척용 폭탄을 만들고, 도시락을 이용해 자신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폭탄을 제조하였습니다.

 

 

4월 29일, 윤봉길 의사는 일본 국왕 탄생 기념행사가 열리는 장소에서 경비가 삼엄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상 앞쪽에 위치하였습니다.

 

기념식이 진행되는 동안 윤봉길 의사는 물통 폭탄을 힘차게 투척하였고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도시락 폭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계획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투척한 물통 폭탄으로 인해 일본 최고사령관을 포함한 20여 명이 부상 또는 사망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중국의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용사가 홀로 이루어 냈다"라고 높게 평가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중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한국 독립 운동에 대한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군에게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군사법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12월 19일 오사카 감옥에서 총살형 집행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셨습니다.

 

그 후 1946년도에는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서울특별시 효창 공원으로 이장하였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업적을 기려 1962년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윤봉길 의사 공적>

윤봉길 의사(1908년 6월 21일 출생 ~ 1932년 12월 19일 사망)는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1918년 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3.1운동 발생 후에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여 학교를 자퇴하였습니다.

 

 

그런 뒤 작은아버지 밑에서 동생과 같이 한학을 배웠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이라는 곳에서 사서삼경과 같은 한문학을 지속적으로 익혔습니다.

 

1926년부터 농민들을 계몽하는데 힘썼으며, '농민득본'이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월진회라는 단체도 설립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문맹자들을 위한 야간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1930년도에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굳은 결심을 하고 '사나이가 집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남긴 후 중국 상하이로 떠났습니다. 그는 해당 장소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리더였던 김구 선생님을 만났고, 한인 애국단(중국 상하이에서 결성된 항일 독립 운동 단체)에 입단하여 국가를 위해 희생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1932년 4월 29일에는 일본 국왕 탄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식장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의 최고사령관을 포함한 20여 명의 주요 인물들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고, 한국의 독립 운동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설명을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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